지적설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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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1 03: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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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신의 언어 (Language of God) ; 프란시스 콜린스

Language of God 서평
저명한 과학자이자 신실한 크리스천 프란시스 콜린스, 한국 독자에게 유신 진화론을 설득하다. 과연 누가 설득 당할 것인가?


몇년 전에 읽었던 프란시스 콜린스의 Language of God이 ‘신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었다. 국내 역서 출판과 맞추어 다시금 예전에 읽었던 책을 펼쳐들고 과연 콜린스의 견해가 국내 독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지적설계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프란시스 콜린스의 입장이 그리 달갑진 않고, 지적설계 진영에 대한 케케묵은 오해들을 다시 끄집어내고 있다는 면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긴 하지만, 다양한 크리스천 과학자의 견해가 소개된다는 것은 반길 일이며, 그의 견해가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 긍정적인 면도 한번 생각해보는것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특히, 창조과학적 견해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유익한 점이 없진 않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물론 프란시스 콜린스는 지적설계를 긍정적인 그 무엇으로도 평가하는 입장이 아니기때문에 그의 비판에 대한 지적설계 진영의 변호 역시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해주어야하는 것이 이 책의 번역에 발맞추어 지적설계 진영에서 당연히 해야할 일 중 하나일 것이며 이 서평의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프란시스 콜린스는 누구인가?
프란시스 콜린스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후 예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노쓰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MD 학위를 취득학 내과의이자 유전학자이다. 잘 알려져있는대로 그는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총 책임자로 인간의 유전 암호들을 해독하는 일의 선봉에 섰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이자 과거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전향한 한명의 신실한 크리스천이다. 최근에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부름으로 미국 국립 보건원(NIH)의 총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유명한 과학자가 자신의 신앙과 과학의 조화를 추구하는 책을 썼다. 그는 자신의 책 서두에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기술하기를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으로의 전향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과학자 가운데 무신론자의 비율이 높다는 통계가 있는데다가, 진화론을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무신론자인 이러한 풍조가운데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과학자가 자신이 크리스천이며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주위 과학자 동료로들로부터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했고, 유신 진화론을 주장하는 입장이기때문에 보수적 기독교 세력으로부터도 그리 달가운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용기있는 그의 신앙고백이 반갑다. 더 많은 훌륭한 과학자들이 자신의 신앙과 과학의 조화에 대한 입장들을 밝히고 신앙과 과학에 대한 건설적인 대화의 시발점이 되길 바래본다. 그는 유신 진화론을 다른 이름 ‘Biologos’로 바꿀 것을 제안하며, 책의 출판과 함께 템플턴 재단의 지원을 받아 바이오로고스 재단 을 설립하고, 재단의 총 책임자로 자리잡고, 진화론과 신앙은 서로 양립가능한 것임을, 진화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크리스천들에게 진화를 받아들일 것을 권하고 있다. 물론 국립보건원의 책임자로 자리를 옮기면서 바이오로고스의 책임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긴 했지만, 프란시스 콜린스의 유신진화 진영에의 기여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며, 그는 유신진화론의 대표적 인물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도킨스와 같은 극단적인 무신론자도 프란시스 콜린스 같은 인물의 존재는 조금은 신경이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과학과 종교의 양립이 불가능하냐는 어떤 기자의 질문에 도킨스는 프란시스 콜린스를 언급하면서 양립가능한 입장도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 물론도킨스는 예전부터 고수해오던 자신의 양립 불가능 입장을 철회하진 않았다(일부 신문 기사에서 도킨스의 양립 불가 철회설이 나돌긴 했지만 이는 카더라 통신에 불과했다) .

책의 구성
첫번째 파트에서 그는 자기의 신앙적 여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회심하게 된 배경과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번째 파트에서는 본론격으로 우주, 생명의 진화에서부터 자신의 주 업적인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성과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다. 세번째 파트가 본론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인데 생명의 기원에 관한 어떠한 입장을 우리가 취할 수 있는지를  논한 부분이다. 그는 크게 네가지 입장으로 분류한뒤 각각을 분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첫번째 옵션으로는 무신론 내지는 불가지론 입장, 두번째 옵션은 창조과학적 입장, 세번째 옵션은 지적설계론 입장,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그가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바이오로고스 즉 유신 진화론 입장이다. 그가 독자들에게 유신진화론을 제시하는 방법은 무신론, 창조과학, 지적설계론을 차례로 간략히 반박한 뒤 독자들에게 바이오로고스를 제시하는 방식을 취했다.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톤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우며 생물학이나 진화론에 문외한인 이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여졌다. 지적설계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무신론에 대한 대응이나 창조과학을 바라보는 입장들은 대부분 동의하는 입장임을 먼저 밝혀야겠다. 하지만 아쉬움 점은 콜린스와 같은 석학도 지적설계론을 이슈로 다룰때면 신중하지 못한 모습들을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대중들을 위한 한권의 책에 무신론, 창조과학, 지적설계론을 충분히 반박하고 바이오로고스의 여러 입장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이해하며, 바쁜 일정가운데 지적설계와 유신진화, 창조과학, 무신론진영의 모든 토론의 내용들을 다룬다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지적설계론에 대한 허술하고 부정확한 반박을 할바엔 자기가 가진 입장에 보다 충실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지적설계와 유신진화사이의 쟁점이 되는 여러 이슈들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였다는게 더욱 아쉬운 대목이다. 차라리 지적설계 입장에 대한 반박을 제외하고 독자들에게 울트라 문자적 성경해석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진화에 대한 개방적 시각을 가질 것을 권하는 정도에서 그의 신앙 고백을 마무리했으면 충분히 일반 독자들에게 설득력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유신 진화를 설득하려면, 과학적 근거를 둔 다윈주의 모델의 정합성을 보여달라.
필자는 유신 진화론의 주장에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며,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들에 귀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다. 똑같이 설계 가설에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며, 왜 설계 가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자체가 그렇게 문제가 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유신 진화 진영에서도 설계 진영을 향하여 조금 더 구체적인 경험적 근거를 통해 반박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신의 언어( Language of God)와 같은 유신 진화 진영의 글들을 계속 읽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며, 그러한 근거들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계속되는 글읽기에서 느끼는 아쉬움이다.
콜린스가 다윈주의 진화론의 근거로 책에서 제시한 내용을 읽고서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그 어디에도 무작위적 변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이 생명의 기원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가 제시한 것은 지적설계 진영에서도 상당수 동의하는 공통 조상(common ancestry)에 대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 지적설계 진영과 유신진화 진영이 대립하는 주된 부분 중 하나는 과연 무작위적 변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주의 메커니즘이 오늘날의 생물학적 복잡성과 다양성을 설명하기에 충분한가 하느냐에 있다. 이 질문에 자세한 설명없이 지적설계를 선택가능한 옵션에서 쉽게 제거해버리는 접근방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가 제시한 다양한 생명체간의 염기서열의 유사성은 과연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게 했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만약 다윈주의 메커니즘이 오늘날 생명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설명해줄 메커니즘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에 맞는 설명을 제공했어야 한다. 아쉽게도 그러한 설명은 책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유신진화론의 핵심이 단지 공통조상 뿐이라면 굳이 다윈주의(Darwinian) 진화라는 이름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적설계 진영과 그렇게도 의견 차를 강조할 필요도 없고, 이와 같은 서평도 불필요할 것이다.
유신진화론에서 다윈주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간주하고 있는가를 앞서 기술했지만 사실, 유신 진화론은 지적설계 진영처럼 매우 넓은 스펙트럼의 입장을 포괄한다. 이름 자체에서 주는 인상은 진화론에 개방적인 유신론 입장을 모두 포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약 진화했다는 사실에 개방적인 모든 유신론 입장을 포괄하고자 한다면, 대다수의 지적설계론자들을 유신진화 진영에 포함했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적설계론자들의 다수는 진화 사실을 인정하며, 상당수가 공통조상에 관한 내용도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추론으로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지적설계 진영과 유신 진화 진영은 이렇게도 대립각을 세우는 것인가? 첫번째 대립의 이유는 다윈주의 메커니즘의 충족성에 대한 의견 차이이며, 둘째는 설계 가설을 하나의 선택 가능한 가설로서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이슈, 다시 말하면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방법론적 자연주의만이 적법한 과학의 방법론인가의 질문에 동의하는가 여부에 있다. 첫번째 대립 이유는 사실 유신 진화 진영 내부적으로도 의견을 달리한다. 나는 유신 진화 진영이 이에 대해 조금은 더욱 명확한 입장을 밝히길 기대하고 있다. 바이오로고스 단체는 다윈주의 메커니즘의 충족성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존 폴킹혼과 같은 유신진화론자의 경우, 그는 다윈주의 진화 메커니즘이 충분치 않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 반면, 켄 밀러나 프란시스 콜린스 같은 경우는 충분하다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다윈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에 변호로 일관하는 대부분의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진화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다윈주의 진화 메커니즘이 충분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며, 매우 오래된 논쟁적인 사안이라는 것을 꼭 지적해야겠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다윈주의 진화론을 그렇게도 변호하려 드는지 개인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차라리 폴킹혼과 같이 다른 자연적 기제에도 가능성을 열어두는 입장이 더욱 바람직한 유신진화론의 입장일 것이다. 물론 그는 다윈주의 메커니즘 외의 다른 자연적 설명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지적설계 진영과 확연히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음이 두번째 대립의 이유이기도 하다. 두번째 대립의 이유는 과학의 방법론으로서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가 적절한 방법론인가의 문제이다. 대부분 지적설계론의 주 반대 이유는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지적설계 진영에서 다윈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반대가 유효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내세우는 설계의 탐지라는 것 자체가 비자연적 요소를 과학에 끌어들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서평에서 그 내용을 길게 서술할 생각은 없다. 이를 지적하는 요지는 지적설계를 크리스천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에서 제거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만이 과학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방법론이라는 합의를 먼저 끌어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의는 책에서 빠져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적설계 진영과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콜린스는 유신 진화 진영을 매우 넓게 포괄하고자 시도했다. 그가 제시한 6가지 공통된 유신진화 진영의 전제를 살펴보자.
첫째, 우주는 약 140억년전 무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 둘째, 확률적으로 대단히 희박해보이지만, 우주의 여러 특성은 생명이 존재하기에 적합하게 짜여졌다. 셋째, 지구에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메커니즘은 알려져있지 않지만, 한번 생명이 시작된 다음부터는 진화 과정과 자연선택이 생물학적 다양성과 복잡성을 매우 오랜시간에 걸쳐 발달하도록 하였다. 넷째, 진화 과정이 시작뒨 뒤에는 어떤 특별한 초자연적 간섭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섯째, 인류도 이러한 과정의 한 부분이며 유인원들과 공통조상을 공유한다. 여섯째, 하지만 인간은 진화론적 설명과는 다른 방식의 독특함을 가지며 이는 우리의 영적 본성을 지칭한다. 이는 우리의 도덕법(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존재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특성을 포함한다.
   아쉽게도 그가 제시한 6가지 전제들은 지적설계 진영과의 유신진화 진영을 가르는 차이점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들이다. 그가 제시한 모든 전제들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지적설계론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면 과연 유신 진화 진영의 공통된 전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콜린스는 지적설계의 가능성을 배제하면서 유신 진화론을 독자들에게 권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가지 코멘트를 하자면, 그들의 전제속에 추가되어야할 부분은, 그들은 설계적 요소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지적설계 진영에서 이야기하는 설계의 경험적 탐지 가능성을 부인한다는 것이며, 과학에서는 자연적 원인만을 탐구대상으로 해야한다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수용해야한다는 전제를 추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단락에서 부연하겠지만, 이러한 입장 차이는 신학적 문제와 과학철학적 문제와 연결된다. 설계, 즉 지적 원인의 경험적 탐지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에서 나타난 여러 기적과 같은 사건들의 경험 가능성을 부인하는 입장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물론 아니라는 흥미진진한 반론을 기대하고 있다), 최소한 기적을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방식 외의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만든다. 또한, 방법론적 자연주의만이 적법한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과학적이며, 무엇이 비과학적인지에 대한 과학철학적 난제를 해결해야하는 큰 부담을 안아야된다. 지적설계론의 입장을 바람직하지 않은 입장으로 제시하면서 유신진화와 지적설계가 맛닿아있는 문제점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문제를 덮어두려는 시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가 지적설계에 대한 과학적 반론은 그동안 지속되어왔던 논쟁의 단면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그는 말하기를, 지적설계에 대한 수많은 과학적 반론들이 있었고, 관심있는 독자들은 찾아보라고 권하면서 대표적 세가지 반론을 제시한다. 콜린스에겐 미안하지만, 그가 제시한 반론 역시 지적설계 진영에서 틀린 반론이거나, 충분치 못한 반론이라는 답변이 있었다.

유신진화를 설득하려면, 여러 신학적 문제들과 충돌이 없음을 보여달라.
자, 이 정도로 다윈주의 진화 메커니즘의 정합성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다음 신학적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자.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해야할 하나는 우리는 성경에 어떠한 권위를 두는가, 우리는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는 계몽주의의 빛 아래에서 성경도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 치부하고 인간 이성의 합리성으로 성경을 재단하려드는 이성주의의 거대한 도전 앞에 있다. 이는 이성 자체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 대한 우려를 의미한다. 성경 해석의 자유주의화는 근본주의화 못지않게 위험하다고 평가해야할 것이다.
신학적 문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다윈주의 메커니즘의 핵심은 무작위적 변이와 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에 있다. 유신 진화 진영이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무작위적인(random) 변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자율적(autonomous) 메커니즘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로 사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속에 무작위성(randomness)이라는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콜린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다윈주의에서 사용되는 무작위적(random)이라는 말은 ‘예측 불가능한(unpredictable)’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며 실제 메커니즘 자체는 인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다(specified)는 논리를 편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창조 과정을 진행시켜오셨고, 인간에게는 탐지 가능할만한 설계의 흔적은 남기지 않으셨다는 주장인 셈이다. 유신 진화 진영에 묻고 싶은 질문은 하나님께서 설계의 흔적을 남기시지 않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도킨스의 질문을 인용하면 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굳이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을 만들었냐는 것이다 . 실제로 하나님이 흔적을 남기시지 않으셨다해도 상관은 없지만, 흔적을 남기셨을리 없다는 주장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한다. 지적설계 진영의 주장은 우리가 탐지할 수 있는설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성경 해석의 문제로 넘어가보자.  콜린스는 단언하기를 천지 창조 기사를 담고 있는 창세기의 앞부분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시편이나 욥기서와 같은 시적 표현이며 상징적,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해야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최초의 인간으로 기술되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도 실존 인물이 아닌 상징적으로 해석된다고 밝히고 있다. 창세기 기사의 울트라 문자적 해석에 유연성을 두어야 한다는 그의 견해에 동감하지만, 창세기가 시적 표현이라 인정한다해도 그 안에 역사적 기술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로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어떤 역사적 사건을 시로 표현했다고 가정했을 때, 시에 담겨있는 시적 표현이 있겠지만, 그 안에 역사적 사건의 사실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경우, 여러 성경해석의 뒤틀림 역시 불가피하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으로 비롯된 족보가 그 예이다. 상징적 인물에 왜 굳이 몇살에 ‘셋’이라는 자손을 낳고, 몇세를 살다 죽었다는 식의 역사적 기술이 뒤를 따르는것일까. 지금 나는 이러한 모든 창세기의 구절구절을 예로 들며 문자적, 역사적 기술로서 받아들여야 함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주장하려는 바는,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실존에 대한 특정 입장을 갖게 됨으로서 결과적으로 연관 성경의 해석 역시 뒤틀리게 되며, 성경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해석의 문제들을 조심스럽게 다시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콜린스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아쉽게도 그는 성경의 해석 문제에 대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신중한 고찰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창세기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두고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남용되다 못해 그의 본 의도를 왜곡하는 수준이다. 한가지만 묻자. 어거스틴은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거부하였는가? 그는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에서 창세기의 여러 가능한 해석들을 다루고 있고, 더 나아가 창세기가 하나의 예언으로서 알레고리적 의미도 가지고 있는지를 고심하였다. 더욱이 책 제목 자체가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이다. 그는 문자적 해석을 포기한게 아니라 다양한 해석학적 관점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것일 뿐이다. 다시금 강조하면, 어거스틴은 창세기가 시적,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되어야한다는 콜린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되어야 할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성경의 울트라 문자적 해석에서 벗어나자는 콜린스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창세기의 기사를 시적 표현과 알레고리로 이해한 나머지 그 안의 어떠한 역사적 의미도 없는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접근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는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신학자가 아닌 콜린스에게 엄밀한 신학적 해석 작업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해서 그러한 점이 콜린스의 신의 언어에 대한 비판의 방패막이가 될 수는 없다. 그가 인용하는 보수 신학자인 벤자민 워필드와 기독교인이라면 친근한 C.S. 루이스 역시 오늘날의 유신진화 진영에 섰을지는 미지수이다. 유신 진화 진영에서 동료 기독인들에게 그들의 입장을 설득하기 위해서 자주 등장시키는 교부 어거스틴, 보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 변증가 C.S. 루이스, 신학자 존 스토트 등은 지적설계와 유신진화의 논쟁지점이 맛닿아있는 이슈와 관련해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어거스틴, 워필드, 루이스는 모두 현재 논의되는 지적설계 이론이 등장하기 전의 인물들이며, 스토트는 이와 관련해서 명확한 입장을 밝힌바가 없다. 오히려 이들의 입장은 ‘인도된 진화(guided evolution)’의 입장으로 지적설계 진영과도 상당 부분 맥을 같이 할 수 있다고 하겠다. 누구누구는 누구 편이냐는 식의 편가르기가 유치할 수 있지만, 진화에 개방적인 입장이라고 다 유신진화 입장은 아니라는 오늘날의 논쟁구도는 세밀하게 다루어야할 필요가 있다. 특히 콜린스처럼 지적설계를 바람직한 하나의 입장으로 배제하면서 유신 진화를 제시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지난 단락에서 언급한 바 있는 유신진화의 6가지 전제 중 네번째 전제로 돌아가보자. 콜린스는 유신진화 진영의 공통 전제를 이야기하기를, 진화과정이 시작된 뒤로는 어떠한 초자연적 간섭도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경험적,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선험적 확신인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이러한 단언은 경험적 근거로 뒷받침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사소한 예외를 제쳐두고라도 우리는 진화의 큰 과정에 대한 부분적 밑그림만 가지고 있지, 수많은 과정들이 빈틈으로 남겨져 있다. 자연적 설명을 추구해야한다는 그들이 제시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수많은 빈틈을 채워왔음도 사실이지만, 아직 채우지 못한 빈틈이 더욱 많은 것이 과학자들의 솔직한 답변일뿐더러, 방법론적 자연주의라는 그들의 방법론이 이러한 빈틈을 메울 수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선험적 확신 또한 그 어디에서도 보장되지 않는다. 또한 어떠한 초자연적 간섭도 필요치 않다는 대목은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단면임을 보여준다. 다음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이러한 대목은 그가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인용한 벤자민 워필드 역시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가지 또 생각해볼 문제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타락’이라는 개념에 유신진화론은 어떤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콜린스는 이에 대해 자세한 언급을 하진 않았는데, 바이오 로고스 재단의 또 다른 유신진화론자인 칼 가이버슨은 그의 저서 ‘다윈 구하기(Saving Darwin)’에서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부인한다 . 그는 말하기를 인류는 그 시작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기적인 진화 과정으로부터 인류가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유신 진화진영은 인류의 타락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을 제시하는가? 이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기도하며 유신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앞서 그들의 성경해석에 신중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콜린스가 이야기하듯이 다윈주의 진화론이라는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화해와 조화가 가능한 것이라면, 어떤 신학적 양보가 필요한지 먼저 자세히 밝힐 필요가 있다.

벤자민 워필드와 C.S. 루이스는 오늘날 유신진화 진영에 섰을까?
프란시스 콜린스가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창조과학 진영을 향해 뽑아든 카드는 C.S. 루이스와 보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이다. 나는 그의 전략을 통해 6일 창조에 대한 문자적 성경 해석을 고집하는 창조과학 진영이 조금은 더 유연성 있는 성경 해석에도 열려지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며 이 책의 긍정적 면으로 기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려되는 일은 콜린스의 워필드에 대한 인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워필드와 같은 위대한 보수 신학자도 오늘날의 유신진화론을 지지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게 되는 일이다. 이렇게 된다면 크리스천들이 지적설계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유신 진화론 입장으로 전향하기가 쉬워질지도 모르는데, 이러한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길 바래본다.
벤자민 워필드는 구 프린스턴의 신학자로 보수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의 계보를 잇는 찰스 핫지의 제자이다. 프린스턴으로 가기전에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다윈의 진화론에 상당부분 열려 있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음은 사실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극도로 경계했던 스승 찰스 핫지와는 달리 그는 신학적 보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과학적 새로운 발견들에 대해 상당히 열려 있던 학자였다. 콜린스의 말대로 그가 진화메커니즘을 하나님께서 창조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에 열려있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봐라, 보수적인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도 진화론을 수용한 유신진화론자였다'라고 쉽게 넘어가기엔 워필드의 입장을 현대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관점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언급해야할 것은, 그는 ‘진화’라는 커다란 명제에 매우 개방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30년이 넘는 세월을 다윈주의 진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적이었다. 또한 워필드는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공통 조상 이론과 다윈의 이론을 구별할 줄 알았다. 더욱 중요한 면은 워필드는 창조에 관한한 다양한 가능성에 개방적인 인물이었고 마크 놀은 그의 입장을 평가하기를 방법론적 다원주의(methodological pluralism)라 부르기 까지했다 . 과연 공통조상이론이 아닌, 다윈의 이론 즉, 무작위적 변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이 오늘날의 생물학적 복잡성과 다양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라는 비판에 대해 워필드는 어느 편에 섰을까?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만이 적법한 과학적 방법론으로 변호하는 유신진화 진영과 이를 비판하는 지적설계 진영을 두고, 과연 워필드는 어느 진영에 섰을까? 나는 워필드야 말로 유신진화 진영에서 인용할 신학자가 아니라 오늘날 지적설계를 지지하는 크리스천들이 새롭게 해석해야할 신학자로 평가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워필드가 오늘날 살아있었다면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비판했을 것이며,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며 창세기 서두의 역사성을 폄하하는 콜린스의 창세기 접근법을 비판했을 것임은 물론이며, 전통적 ‘타락’의 개념을 부인하는 칼 가이버슨과 같은 유신 진화론자의 주장에는 더더욱 그 입장을 달리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C.S. 루이스에 대한 평가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다윈의 이론이 현대판으로 종합되는 것을 보고 죽었지만, 지적설계 이론이 공론화되는 현대의 논의와는 훨씬 이전의 인물이다. 그의 저서 ‘고통의 문제’에서 자주 인용되는 그의 진화에 대한 개방적인 입장 은 콜린스 역시 인용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가 과연 오늘날의 유신진화 진영에 섰을지는 미지수다. 루이스의 진화에 대한 관점에서 간과되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다윈주의 진화에 대한 그의 개방적인 입장이 훗날 회의적 입장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 CS 루이스 협회(CS Lewis Society)의 톰 우드워드(Thomas Woodward)는 오늘날의 논쟁 구도속에서라면 루이스는 지적설계의 편에 섰을 것으로 평가한다 . 루이스가 과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때문에 그의 입장을 오늘날 유신진화-지적설계 논쟁 구도에서 쉽게 판단할 수 없음은 사실이지만, ‘고통의 문제’가 출판된 이후 루이스가 다윈주의를 비판하는 동료의 견해로 기울었음을 보여주는 편지의 기록과, 그가 오랫동안 자연주의 철학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음, 또한 그의 영향이 초창기 지적설계를 지지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미친 영향을 본다면 단지 유신 진화론 입장으로만 해석될 인물은 아님이 분명하다.

도킨스가 유신론을 향한 허수아비 공격의 대가라면, 콜린스는 지적설계 진영을 향한 허수아비 공격의 대가?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콜린스는 유신론을 향한 도킨스의 무신론 공격에대하여 방어하며 말하기를, 그는 허수아비 공격의 대가라고 이야기하면서 유신론을 변호한다. 그의 변호는 주로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책 Dawkins Delusion에서 인용되었으며, 대부분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도킨스의 허수아비 공격은 그다지 새삼스런 이야기는 아니다.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도킨스의 허수아비 공격의 전형이 콜린스가 지적설계를 향한 비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콜린스는 지적설계 진영을 설명하기를 지적설계 진영이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고 한다. 첫째, 진화론은 무신론 세계관을 권장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자연계의 내재적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기때문에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셋째, 진화론이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다면, 이는 지적 설계자가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지적설계 이론을 지적설계론가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게 정의하면서 비판한다면 손쉬운 비판은 될지 모르지만, 허수아비 공격으로 일관한 그의 지적설계 비판에 대해 도킨스와 똑같은 평가를 내려주지 않을 수 없다. 계속되어오는 지적설계론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얼마나 더 많이, 더 자주 바로잡는 글을 써야 이러한 오해가 풀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몇가지 사실 관계만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첫째, 지적설계 진영에서 반대하는 것은 다윈주의 진화론에 대한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무작위적 변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이 오늘날의 생물학적 복잡성과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다윈주의에 대한 과학적 비판이다. 지적설계 진영에서 진화론이 무신론 세계관을 권장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은 사실관계에 맞지 않다. 둘째, 지적설계 진영은 진화를 반대하지 않으며, 지적설계는 진화와 양립 가능하다. 거듭 밝히지만 지적설계는 시간에 따른 변화라는 진화의 정의와 전혀 상충되는 바가 없으며, 공통 조상 이론과 관련해서도 상충되는 바가 없다. 셋째, 지적설계의 논리는 설계를 추론, 탐지하고자 하는 시도이지 신존재 증명이나 진화론에 대한 네거티브 전략만을 취하는 어떤 운동이 아니다. 콜린스와 같은 석학이자 신실한 크리스천이 지적설계를 비판함에 있어서 허수아비 공격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유감이다.
콜린스는 지적설계를 과학적 이유와 신학적 이유로 반대하는데, 신학적 이유로 ‘빈틈의 하나님’ 오류를 첫번째로 꼽았다. 논쟁에 관심있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듯이, 지적설계 이론은 빈틈의 하나님 오류라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물론 지적설계 진영은 빈틈의 하나님 오류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으며, 지적설계의 주장은 빈틈의 하나님 주장이 아님을 자주 강조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콜린스가 그의 책에서도 빈틈의 하나님이라는 비판을 되풀이한다는 것 역시 매우 유감이다.
그는 책 초반에 우주론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빅뱅과 같은 우주의 시작과 같은 사건의 배후,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생명이 존재할 수 있도록 미세조율되어 있다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뭔가 하셨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콜린스에겐 미안하게도, 지적설계론을 두고 빈틈의 하나님 오류라 비판하면서, 자신의 우주론과 관련된 주장에서 자신이 지적했던 오류를 파악하지 못한다는게 애석하기 짝이 없다. 우주론에 있어서 신적 활동에 대한 설명을 허용한다면, 왜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지적설계 진영에서는 그것이 꼭 신적 활동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콜린스와 같은 유신 진화론자들에게 물어봐야할 질문이다. 하나님의 신적 활동을 우주론에서 추론하는 것은 괜찮은 것처럼 주장하면서, 유독 생물학에서 설계 추론(design inference)을 적용하면 빈틈의 하나님 오류라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을 보이지 못하는 부분이다.
사실, 이러한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못한 부분은 다윈주의 무신론자들에게 손쉬운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다.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된대로 기적을 행하셨고, 과거 역사에 초자연적 사건을 통하여 개입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한 오늘날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 가운데 간섭하고 계시다면 그러한 개입의 흔적 역시 발견될 수 있어야 하는것이 아니냐며 도전한다. 처녀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인류 역사가운데 일어났고, 그것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경험되고 목격되었다는 것에 대한 고백에 기초하고 있다. 콜린스의 말대로 기적이란 베이지안 확률에 기초한 매우 낮은 확률적 사건이 일어나는 어떤 현상에 불과한 어떤 현상이란 말인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역시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매우 낮은 어떤 확률적 사건이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적 특성을 띄고 일어난 현상인가? 콜린스는 이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으니 ASA의 다른 유신진화론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들은 이러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구원역사(salvation history)와 형성 역사(formative history)를 나누어 설명하기를 시도한다 .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위해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개입하시기도 하지만, 우주와 지구, 인류가 만들어지는 형성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연 성경을 통해 제시된 인류의 역사가 어떤 기준에 의해 구원역사와 형성 역사로 명확히 나누어질 수 있는지 나는 의문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은 왜 구원 역사라는 큰 줄기에서 명확하게 배제되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교 권위에 희생당한 과학적 이성의 상징인가?
콜린스는 책에서 갈등 관계처럼 보이는 신앙과 과학의 관계가 더이상 갈등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없으며 현 주류 진화 이론으로 대변되는 다윈주의 진화론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우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항변한다. 과거 종교의 권위에 희생당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예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말이다. 나는 과학과 종교의 갈등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징으로서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예화에 상당한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갈릴레이가 종교적 권위와 문자적 성경해석으로 인한 오해와 부당한 처우를 받았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요지는 갈릴레이의 과학적 주장이 재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가 갈릴레이가 제시한 경험적 증거와 주장들이 단지 종교의 권위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볼 순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결정적 원인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당시 재판에서 제시했던 지동설에 대한 근거가 틀렸기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이 흔히들 알고 있는 종교 권위에 희생당한 참된(?) 과학자 갈릴레이의 이야기는 과학과 종교를 갈등 관계로 몰아붙이기 좋아하는 이들에 의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당시 정상과학으로서 작용하던 천동설을 뒤집는 것이 단지 경험적 근거만으로 쉽게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짐작은 된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견해가 1633년 재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주된 결정적 이유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그의 주장을 종교적 이유로 반대했기때문이 아니라 그 재판에서 그가 제시했던 근거가 틀렸기 때문이었다.
책의 전체적 내용과 크게 상관없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얽힌 이야기에 굳이 딴지를 거는 이유는, 주류 과학에 대해 비판적이라해서 오늘날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극단적 갈등관계로 몰아가는 양극화가 불편해서이기도 하며, 단지 그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상호 철저한 검토도 없이 쉽게 화해를 추구해버리는 성급함도 막고자 함에 있다.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계시를 통한 메시지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를 해석함에 있어 조화를 추구해보고자 하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되 우리의 성경해석이 바른가를 돌아보는 자세, 과학자 커뮤니티에서 밝혀진 결과들의 지적 성실성(integrity)을 인정하되, 과연 그 결과가 실제 의미하는 것과 어디까지 외삽(extrapolation)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를, 과연 과학자들이 실제로 자기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과감한 주장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를 돌아보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할 것이다.

글을 맺으며
서평의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과연 누가 설득 당할 것인가?’ 아마도 유신 진화를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콜린스의 커밍아웃이 반갑기 그지 없을 일이다. 이렇게 저명한 과학자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며,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신실한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신앙과 과학은 절대 조화가 불가능하다는 무신론자들의 비판에 맞설때 자주 인용되는 한 사람이 이젠 프란시스 콜린스가 되었다. ‘봐라, 콜린스 처럼 유명한 과학자도 크리스천으로서 신앙과 과학의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부인할 수 없게도 프란시스 콜린스의 존재만으로도 무신론 진영의 과학과 신앙 조화 불가능이라는 명제는 변호하기가 조금 수월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적설계를 지지하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어떨까? 아쉽게도, 지적설계 진영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콜린스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해야겠다.  그가 유신진화 입장을 독자에게 설득하기위해 내세운 방식은 선택가능한 다른 옵션들을 제거함으로서 독자들을 유신진화론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취했다. 무신론 진영을 반박하기위해 알리스터 맥그라스를 내세워 반박한다.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고 있는 창조과학 진영을 설득하기 위해 보수 신학자인 벤자민 워필드와 변증가 C.S. 루이스를 내세운다. 다음 선택가능한 지적설계를 두고서는 허수아비 공격을 펼친 뒤, ‘봐라, 바이오로고스(유신진화론)야 말로 과학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는 크리스천이라면 취해야할 바른 입장이다’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유신진화 진영의 입장을 독자에게 설득하기 위해 그가 내세운 것은 매우 포괄적인 유신진화의 6가지 전제이며, 실제로 다윈주의 메커니즘을 충분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였을 경우, 유신 진화 진영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며, 유신진화 진영과 지적설계 진영이 대립하고 있는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 역시 침묵하고 있다. 우주론에서는 ‘빈틈의 하나님’ 오류를 허용하면서, 지적설계의 주장에는 ‘빈틈의 하나님’ 오류라는 누명을 씌우는 이중 잣대 역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창조과학적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 기독교계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2008년과 2009년, 지구의 연대 문제로 창조과학회 내부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점을 미루어볼때, 창조과학 진영이 6일 창조에 관한 젊은 지구 연대 문제를 포기할 수 없는 이슈로 안고 가는 한, 프란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는 창조과학회에 치명타일 수 있다. 장로교 보수 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적 상황에서 벤자민 워필드와 같은 칼빈주의의 거장이 진화론에 대해 개방적(open-minded)이었다는 사실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어라? 워필드가 진화론에 대해 이렇게 개방적이었나?’라는 한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한방에 덧붙여 심지어는 ‘다윈주의는 무신론’이라는 주장을 하던 워필드의 스승 찰스 핫지까지도 지구 연대 문제와 같은 성경 해석에는 상당한 유연성이 있었다는 것을 덧붙임으로서 창조과학회에 문자적 성경 해석에 유연성을 요구하고 싶다 . 하지만 내가 우려하는 바는 창조과학 진영의 사람들이 ‘신의 언어’를 읽고 성경 해석의 유연성과 진화론에 대해 약간의 개방적인 자세를 가졌을 때, 콜린스의 지적설계를 향한 허수아비 공격만을 읽고 지적설계를 하나의 가능성으로조차 고려하지 않은채 유신 진화론으로 쉽게 전향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유신진화론에 대한 고민없이 지적설계론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고려하는 것을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반대로 지적설계론에 대한 신중한 고찰없이 유신진화론을 택하는 것 역시 말리고 싶다.
개인적 평가로, 이 책을 통해 창세기의 울트라 문자적 성경해석을 고집하는 국내 독자들에게 약간의 유연성을 주고 바이오로고스(유신 진화론)라는 생소한 입장을 소개하는 정도라면 그것만으로 이 책의 큰 성공으로 여겨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콜린스의 주장대로 지적설계 진영의 입장이 손쉽게 반박될 성질의 것이라면 이는 콜린스의 오산이다. 또한 보다 중요한 이슈에 대해 깊이 있는 고찰을 담지 못한 것 역시 이 책의 큰 약점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사소한 문제이긴 하지만, 책의 부제로제시된 ‘유전자 지도에서 발견한 신의 존재’라는 광고 타이틀과 영문 원서에서의 부제목인 ‘과학자가 신앙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라는 거창한 광고 타이틀이 실제 그가 쓴 전체적 내용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점 역시 타이틀은 거창하지만 실속은 별로라는 평가를 피할 수 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 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디렉터, 미국 국립보건원의 디렉터라는 훌륭한 과학자 타이틀이라는 권위에 압도되지 않고 그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읽어볼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할만 하다.
아울러 보다 심도 있는 지적설계에 대한 입장을 공부할 이들을 위해, 칼빈 신학대학의 교수이자 과학 철학자인 델 라치의 저서들, 무신론자이면서 과학으로서 지적설계론을 변호하는 과학 철학자 브래들리 몬톤의 ‘Seeking God in Science’, 대표적 지적설계 이론가 마이클 비히의 저서 ‘다윈의 블랙박스’, ‘Edge of Evolution’, 윌리엄 뎀스키의 ‘지적설계(IVP)’, 스티븐 마이어의 신작 ‘Signature in the Cell’을 권한다. 보수 기독교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지적설계 이론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들은 매우 보수적이라 평가되는 미국의 웨스트 민스터 신학대학의 교수Vern Sheridan Poythress가 쓴 ‘Redeeming Science’를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지적설계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지적설계도 하나의 이슈로 다루고 있으므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유신 진화 진영에 있으면서 아직도 ‘지적설계’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이들은, 미국 복음주의권 과학자 협회 정도로 볼 수 있는 ASA의 2009년 베일러대학에서 있었던  컨퍼런스에서 칼빈 신학대학의 Loren Haarsma (Haarsma는 지적설계론의 지지자가 아님)의 ‘유신 진화론과 지적설계의 4가지 신화들’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mp3로 다운받아 들어보길 바란다 . 지적설계와 유신 진화론 사이의 오해를 조금 줄이고 건설적인 대화들이 오고갈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서평]Seeking God in Science: an atheist defends Intelligent Design

ID
2010/05/11

   지적설계론의 개요와 창조/진화 논쟁 (목회와 신학 2010년 4월호)

ID
201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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