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설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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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8 00: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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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베히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윌리엄 뎀스키)


마이클 베히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인터넷에 가서 마이클 베히의 작업에 관한 몇몇 비판들을 읽어보면 아마 당신은 베히가 괴짜이고 사기꾼에 악당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 비판에서는 베히의 작업이 "철저하게 불신임"되었고 "완벽히 뒤집혔으며",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비판자들은 마지못해서 베히의 생화학(베히의 전문 분야인)에 관한 논의들이 흠잡을 데가 없다는 점만은 인정한다. 그러나 베히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정의하고 사용한 부분에 이르게 되면 비판자들은 베히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며, 베히라는 사람은 무시해 버리는 것이 더 안전한 것으로 여긴다. 비판자들은 생물학계가 베히의 작업을 이미 신중하게 조사하였고, 그 결과 베히의 작업은 매우 심각하게 잘못되었고, 그래서 거부하게 되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생물학계는 베히의 작업에 여전히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베히는 진화 생물학에서의 핵심적인 개념적 문제에 집중해 왔다. 문제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그렇게 명백한 것이 아니다.

베히의 도전은 너무나 불편한 것이라 생물학계의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베히의 도전과 제대로 씨름하기보다는 베히의 작업은 이미 불신임된 것으로 그냥 처리해 버리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명성 있는 한 복음주의적 기독교 재단의 대학에 소속된 생물학과가 놀라운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보도에서 그 대학의 생물학 교수들은 베히와 지적설계에게 강력히 반대하기로 결의하였고 동시에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베히의 작업을 존중받게 해 주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베히의 작업을 읽는 것조차도 명백하게 거부하였다. 그래서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베히가 이미 거부되었다고 자신들끼리 서로 지속적으로 재확신하는 편리한 소설이 통용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실제적인 반박이나 다윈주의적 진화에 반하는 베히의 예들을 공격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공정한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어떤 중요한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일 것이다. 만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최고의 굴욕이라고 한다면 베히의 경우는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베히는 자신과 장황한 말로 다투는 시끄럽고 열정적인 한 무리의 비판자들을 끌어 들였다. 논쟁은 베히가 1996년에 출판한 「다윈의 블랙박스」라는 책에 집중되어 있다. 이 책은 매우 많은 개념들을 개척하였고 그것들 중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개념이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베히가 정의한 것처럼 하나의 통합된 여러 부분의 기능을 갖는 시스템에서 만일 그 부품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제거를 하면 그 시스템의 기능이 파괴되면 그 시스템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것이다. 비판가들은 이 개념에 관한 베히의 사용을 두 가지 방식 중에서 하나로 해석하였고 그들 중 어떤 것도 베히의 과제를 정당화해주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비판가들은 베히가 순전히 논리적이거나 순전히 경험적인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논리적인 측면의 논의는 다음과 같다. 어떤 생물학적 구조들은 다윈주의 메커니즘으로는 얻기가 어려워 보인다. 그 구조들은 성질 P(즉,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생물학적 구조들도 또한 성질 P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들 또한 다윈주의적인 메커니즘으로는 얻기 어렵다. 경험적인 측면의 논의는 다음과 같다. 어떤 생물학적 구조들은 대단히 복잡하다. 문헌들에서 어떻게 다윈주의적인 메커니즘이 그들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제안조차도 없다. 그래서 자연선택을 넘어선 어떤 것들이 그 구조들의 생성에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논점을 이루고 있고 매우 다른 질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만일 베히가 순전히 논리적인 측면의 논의만 한 것이라면 베히의 모델은 예를 들어 유한상태 오토마타는 어떤 언어를 생성할 수 없다는 것에 관한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설명과 같이 엄밀하고 수학적인 형식을 갖춰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일 베히가 순전히 경험적인 측면의 논의를 한 것이라면 베히가 실제로 의미한 것은 단순히 어떤 생물학적 대상들에 대한 진화론적 과정들이 적절히 설명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된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논리적이고 경험적인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의 논의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수사학적으로 작용하지만 나쁜 이유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라 한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단어의 작용에 의해서 베히가 논리적인 측면의 논의를 한다고 하였을 경우에 다윈주의자들과 비판자들 사이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었던 것, 다시 말해 생명은 눈이 멀고, 방향성이 없고, 무작정 시행착오를 거치는 다윈주의적 방식으로 생겨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어떤 엄밀하고 잘 정의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다윈주의자들에 따르면 논리적인 측면이나 경험적인 측면, 또는 그 둘의 결합 그 어떤 것도 다윈주의자들의 이론에 제대로 된 도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논리적인 측면의 논의에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다윈주의적 진화의 모든 논리적으로 가능한 방식들을 전부다 끝내 버릴 수가 없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말하는 것은 한 시스템의 모든 부분들이 만일 어느 한 부분을 제거하고 다른 부분들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 시스템의 처음 기능을 회복할 수가 없다는 측면에서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분을 제거하더라도 다른 것들을 수정함으로써 처음의 기능을 회복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또한 일부분을 제거하더라도 독립된 하부 시스템들이 어떤 또 다른 기능을 (선택압이 작용할 수 있는 상상 가능한 어떤 기능) 갖게 되는 가능성도 남겨두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인 측면에서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이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두고 있다. (비판가들은 때때로 베히가 이 점을 부인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베히는 이런 논리적인 측면을 결코 부인한 적이 없다.)

경험적인 측면의 논의의 경우 단순히 무지로부터의 논증이라는 일반적인 오류를 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만일 어떤 생물학적 시스템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우리가 그 시스템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어떤가? 이것이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이나 어떤 다른 물질적인 메커니즘이 그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어떻게 그 메커니즘들이 그것을 만들어 냈는지를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일 것이다. 그리고 논리적인 측면과 경험적인 측면을 결합하는 경우는 가장 초라한 선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베히와 그의 동료 설계 이론가들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동음이의어를 편의에 따라 논리적 내지는 경험적 측면들을 골라서 사용하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가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사실 베히의 원래 계획은 비판자들이 제시하는 것보다 좀 더 정교하다. 베히의 계획은 세 가지 중요한 점들을 통해서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논리적 측면과, 경험적 측면, 그리고 설명적 측면이다. 게다가 베히는 그러한 측면들 중 어떤 것도 뒤섞지 않았다. 논리적인 측면은 이렇다. 어떤 인공적인 구조는 성질 성질 P(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다윈주의적인 과정으로는 적절하게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생물학적 구조들도 성질 P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직접적인 다윈주의적인 과정으로는 도달할 수 없어야한다. 이런 공식은 앞의 논리적인 점과 유사해 보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앞의 공식에서는 접근불가능성이 모든 다윈주의적 메커니즘 전체에 해당되고 있고 그래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모든 다윈주의적인 과정들이 접근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공식에서는 오직 직접적인 다윈주의적인 과정에만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이란 주어진 기능을 점차로 강화시키면서 자연선택을 통해서 한 시스템이 진화해 나가는 것이다. 시스템이 진화할 때 기능은 진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심장의 진화를 생각할 때 심장의 기능이 처음부터 혈액을 순환시키는 것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 경우에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은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만면에 심장의 진화를 생각하면서 심장의 기능이 처음에 포식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커다랗게 두근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고 나중에 심장이 혈액을 순환시키는 기능을 갖게 된 것이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이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그 과정은 시스템이 진화할 뿐만 아니라 그 시스템의 기능이 함께 진화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이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베히는 단지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만을 고려하였다. 이것은「다윈의 블랙박스」를 읽으면 곧바로 분명해 지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정의하면서 문제의 시스템의 기능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히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실제로 어떤 구조가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으로 도달 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가? 「다윈의 블랙박스」에서 제시된 베히의 정의는 실제로는 약간의 조절이 필요하다. 문제는 베히가 일부분을 제거한 후에 남아 있는 다른 부분들을 수정함으로써 원래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베히는 제거만을 고려했지 수정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공짜 점심은 없다」의 제5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곧바로 해결되는 문제이고, 최소의 복잡성에 대한 조건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 대한 개념이 더욱 강화된다. 본질적으로 이 조건은 문제의 시스템은 더 단순해 질 수 없고 더 단순해지면 선택적인 이득을 위해서 필요한 일정 수준의 기능을 유지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조건을 포함함으로써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논리적으로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을 제외시킬 수 있게 된다. 베히가 고려하는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많은 시스템들이 (특히 박테리아 편모가) 최소의 복잡성에 대한 조건을 만족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으로서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을 제거시키면서 베히는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이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떤 것을 확률이 매우 낮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 얻을 수도 있다고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매우 제한된 체스 실력을 가지고서 내가 세계 체스 챔피언으로 군림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크람니크(Vladimir Kramnik)를 열경기 내리 이길 수 있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나의 제한적인 체스 실력에도 불구하고 된 것이지 체스 실력 때문에 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이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생화학적 시스템을 산출해 낸 경우에는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의 내재적인 특성 내지는 능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생화학 시스템들이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으로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설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는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은 매우 확률이 낮은 우연한 사건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런 시스템을 생성할 내재적인 설계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에 의해서 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미국의 러쉬모어산이 바람과 침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바람과 침식에 의해서 러쉬모어산과 같은 조각이 만들어질 순수한 확률 자체는 0이 아니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확률이 아니다.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만들어낼 후보에서 탈락하게 되면 이제는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만 남게 된다. 여기에서 베히의 논점은 더 이상 논리적인 측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측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현재까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생화학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어떠한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도 알려지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껏해야 생물학자들은 다른 기능을 수행해 내는 이 시스템의 하부 시스템들을 분리해 내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복잡한 모든 기계들은 언제나 원래의 기능과는 또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하부 시스템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자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하부 시스템들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그 시스템을 이끌어 내는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에 대한 증거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어떻게 공진화를 겪는 하부 시스템들이 점진적으로 하나의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으로 변화되어 갔는지에 대한 세부적이고도 검증가능한 일관성있는 다윈주의적 설명이다. 이런 설명은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 곧 생겨날 것 같지도 않다. 실제로 이런 설명이 있다면 비판자들은 베히를 비판하면서 단순히 그 설명이 들어 있는 문헌을 언급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베히의 비판가들은 이 점에서 무지로부터의 논증이라고 자신들의 비판의 화살을 돌려 버리려고 하지만 이런 비판은 정당화 될 수가 없다. 이런 비판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성립하게 된다.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 그러나 남용되는 많은 표현들이 그렇듯이 이 표현 역시 상황에 따른 뉘앙스가 필요하다. 분명히 이런 언명은 많은 일상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잃어버린 자동차 열쇠를 찾기 위해서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은 가구 밑을 수색하고 액자 뒤를 찾아보고 몇 사람들을 더 불러와서 함께 찾아 다녀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모든 희망이 사라진 후에 자동차 지붕 위에 놓여 있는 열쇠를 발견하였다. 이 경우에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자동차 열쇠가 발견되는 것보다 앞서지만 이것이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 자동차 열쇠의 경우에 처음에 자동차 열쇠가 있었다는 독립적인 증거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자동차 열쇠라는 것이 원래부터 존재하기는 했는지 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진화 생물학에서의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다. 우리는 가설적인 자동차 열쇠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동차 열쇠가 일반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의 경우는 가상적인 장난꾸러기 요정이 길동이 방에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물론 길동이는 그 요정이 자신의 방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길동이는 매우 열정적으로 런던 경찰청 사람들의 최고 수준의 형사들을 설득하였다. 그 중에서 어떤 이는 이 시대의 최고의 지적인 능력의 소유자들로서 꼼꼼하고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가지고서 수십 년 동안 가상적인 장난꾸러기 요정들과, 요정들이 좋아하는 거주지가 어린이 침실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확실한 증거를 찾아 다녔다. 수십년 동안이나 장난꾸러기 요정이라는 세기적 발견에 대한 열정으로 움직인 그 형사들이 요정이 내는 희미한 빛이나 요정의 머리카락이나 요정의 지문 등 그 어떠한 견고하고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거나 포착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내는데 결코 지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자. 수십 년이 지난 후에 그런 노력의 대가로 얻은 견고한 증거가 단 한 개도 없다면, 만일 부모는 이미 소년의 방에는 요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면, 이제 나이 먹은 소년은 나이 먹은 부모에게 무엇이라 얘기하겠는가?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닙니다. 참견하지 마시고 전문가들이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논리적일까?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진화 생물학자들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만들어 내는 믿을만한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 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만일 여러 번 반복적으로 시도한 후에 당신이 찾고자 기대했던 것을 기대했던 장소에서 찾지 못했다면 만일 당신이 찾고 있던 것이 원래 존재한다는 증거를 결코 갖고 있지 못하다면, 당신이 찾고 있던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에 대해서 베히가 지적했던 주장의 핵심이다. (「다윈의 블랙박스」에서 “출판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를 참고하라.) 이것은 예를 들어 지적 설계 운동의 마스코트가 된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생화학 기계인 박테리아 편모를 만들어 내는 간접적인 단계들 중 한 단계를 알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그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한 여러 개의 단계들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의 단계들에 대한 지식의 ‘부재’는 전반적이면서도 조직적이다. 이것이 바로 프랭클린 해롤드(Franklin Harold)와 제임스 샤피로(James Shapiro)와 같은 다윈주의 비판가들이 (이 둘 모두 지적설계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시스템에 대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이 “희망적인 사색”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는 이유이다.

베히의 주장의 논리적 측면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로는 도달할 수 없는 생물학적 구조들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베히의 주장의 경험적 측면은 진화생물학자들이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생물학적 구조들을 만들어 내는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을 찾는데 전반적으로 실패한 것은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 대한 답이라는 주장을 의심할만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논리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의 주장들이 모여서 일단 최초의 생명체가 무대에 등장한 후에는 생물학적 복잡성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 지속적으로 선전해 왔던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에 대한 압도적인 도전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논리적인 측면과 경험적인 측면의 주장들을 가지고서는 다윈주의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을 설명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으로부터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설계를 도입해야한다는 주장에 대한 적법한 답을 제시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바로 베히의 작업의 세 번째 주된 요점, 다시 말해 베히의 주장의 설명적 측면이 등장하게 된다. 과학적 설명들은 많은 형태를 갖고 있지만 그들이 갖춰야할 필수적인 요소는 인과적 적법성이다. 과학적 설명은 문제의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인과적 힘들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현상은 설명되지 않는다. 베히에게 있어서 문제의 현상은 어떤 생화학적 기계들이 갖고 있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었다. 어떻게 이런 시스템들이 나타났는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논리적인 기반을 갖고서 제거시켜 버린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과학적 증거의 부재가 완벽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이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물질적 메커니즘에 의지하는 것은 훨씬 더 보잘 것 없는 선택이 된다.

그래서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생화학 시스템에 이르게 되면 물질적인 메커니즘이 그들을 만들어 내는데 인과적으로 적합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지성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지성이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정기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갖고 있는 기계를 만든다.) 지성은 그래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만들어 내는데 인과적으로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베히의 주장의 설명적 측면에서는 인과적 적법성에 근거해서 지적 설계가 다윈주의보다는 생화학적 시스템들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 대한 더 좋은 과학적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베히의 논리적이고도 경험적인 요점들은 주로 부정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다윈주의 메커니즘의 한계에 주목한다. 반면에 베히의 주장의 설명적 측면의 요점들은 긍정적인 것이다. 이것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생화학적 시스템들이 사실은 설계되었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기반들을 제공한다. 이런 측면들에 대한 한 가지 질문이 아직은 남아있는 듯 하다. 베히는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을 제거할 때 논리적인 요점을 사용하였고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 대한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을 제거할 때 경험적인 요점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이끌어내는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에 대한 경험적인 증거들의 부재는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의 경우에서 만큼이나 완전하다. 그렇다면 경험적인 측면이 두 가지 형태의 다윈주의적인 과정들을 불필요하게 만들어 버리는데 논리적인 측면이 필요한 것인가? 그러나 사실 논리적인 측면은 경험적인 측면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윈주의에 대한 올가미를 꽉 조여주는 것을 돕고 있다.

만일 당신이 문헌에서 (다윈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윈주의적인 진화를 가장 잘 확증해주는 예를 찾아본다면, 처음에 주어진 방식으로 처음에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는 처음의 주어진 특징을 지속적으로 개량하는 자연선택을 찾게 될 것이다. 실제로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개량"이라는 개념 자체는 전형적으로 주어진 사물이 주어진 측면에서 더 나아지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개량은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에 해당한다. 반면에 (하나의 기능이 다른 기능을 부여하고 그래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개선될 수 없는)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은 비록 종종 화석이나 분자에 관한 자료로부터 진화생물학자들이 추론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엄밀하게 수립하는데는 훨씬 더 어려운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정의에 의해서 자연선택은 존재하는 기능을 선택한다. 자연선택은 미래의 기능을 선택할 수 없다. 일단 새로운 기능이 나타나면 다윈주의적인 메커니즘은 그 기능 역시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환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부분이다. 미리 존재하는 선택 가능한 기능을 드러내는 시스템으로부터 선택 가능한 새로운 기능을 나타내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어떻게 진화하는가? 자연선택은 여기에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모든 무게는 기능이 변화할 때 중요한 전이의 시기 동안에 올바르고 필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무작위적인 변이에게 주어진다. (또는 다윈의 자신의 「종의 기원」에서 제안했던 것처럼 "유리한 변이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연선택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무작위적인 변이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진화시키는데 필요한 연속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실제적인 증거는 전무하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 관한 베히의 논리적인 요점은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을 제거하고 그래서 가장 잘 확증된 형태의 다윈주의적 진화를 제거시킨다. 게다가 그것은 논리적인 분석에 열려있던 유일한 형태의 다윈주의적 진화를 제거한다.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은 반면에 너무나 한정되지 않아서 그것을 정의할만한 논리적인 분석 방법이 없다. (거의 언제나 변함 없이 그들은 연구가 가능할 정도로 자세히 기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그래서 반증 가능하거나 검증 가능하게 만들지 못한다.) 베히의 주장의 논리적 측면에서는 그래서 쓸만한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을 맡아서 처리해 버리고 남아 있는 것들을 경험적인 고찰을 통해서 제거하도록 남겨둔다. 그리고 논리적인 추론이 내재적으로 경험적인 추론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베히는 다윈주의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가능한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어떤 생물학적 시스템들이 우리가 어떻게 그들이 다윈주의적인 과정으로 진화했는지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복잡하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이 직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으로는 진화할 수 없다는 사실과 언제나 안정된 기반을 갖추지 못했던 간접적인 다윈주의적 과정들도 경험적인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베히는 어떻게 상대적인 장점을 평가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지적 설계와 다윈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뤄 내었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에 대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의 논리적이고 경험적이며 설명적인 측면의 주장들을 신중하게 분석하고 풀어냄으로써, 베히는 지적 설계가 생화학적 시스템들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에서도 어쨌든 살아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는 설계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설계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직관과 어떻게 연결시켜야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지적 설계에 대한 대중적인 보도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ꡒ생명은 자연적인 힘으로 생기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래서 설계되어야만 하였다.ꡓ 이런 소리는 지적 설계에 관한 많은 사람들이 직관을 표현해주고 있지만 과학적인 목적으로는 너무나 단순화시킨 것이다. 베히는 너무도 모호하고 정의되지 않은 용어인 “너무나 복잡한”이라는 말 대신에 엄밀하게 정의된 용어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도입함으로써 이런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인도되지 않은 자연적인 힘의 불충분성으로부터 어떻게 설계로 합리적으로 옮겨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Simulating Irreducible Complexity (김창환)

ID
2006/01/18

   미국의 지적설계 논쟁과 핵심 이슈들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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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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