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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01: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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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설계 김영식 박사 인터뷰
지적설계 김영식 박사  인터뷰
지적설계, 창조과학과 진화론의 비생산적인 긴장을 넘어서!

입력 : 2007년 02월 20일 복음과상황

김영식 박사는 서울대학교 전기컴퓨터 공학부에서 며칠 후 박사학위 수여를 앞두고 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창조과학을 처음 접하고 그 한계를 목도한 이래 현재까지 창조과학을 넘어설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해 고민해왔다. 서울대학교 입학 이후 SCR(SNU Creation Research)이라는 창조과학 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현재는 모임의 한글 명칭을 서울대학교 지적설계 연구회로 바꾸고 최근까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지적설계 연구모임은 지난 10년 동안 격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져왔으며, 최근에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지적설계 아카데미를 개설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지적 설계 연구회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교회는 어려서부터 다녔지만, 실제 회심은 중학교 때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창조과학을 처음 접했는데, 처음에는 너무 신선하고 재미있었지만 그 한계를 금방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비판이 있는데, 그에 대한 답변은 왜 별로 없었는가? 당시에는 순진한 마음에 혼자서라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1998년에 서울대 창조과학 모임을 결성하면서 지금의 많은 동역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임에서는 창조과학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고 오랜 시간동안 많은 논의를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사이어나 쉐퍼 등의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기초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많은 입장들에 대하여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달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모임이 결성된 직후부터 미국에서 90년대에 등장한 지적설계를 접하게 되었는데, 몇 년간 이 주제를 함께 공부한 후에 이것이 우리가 찾던 대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와 관련된 책들(다윈의 블랙박스, 지적설계)을 번역하기도 하였고, 모임 이름도 창조과학 모임이 아니라 지적설계 모임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창조과학의 한계라고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지적설계 이론이 그러한 한계의 대안이 되는 것입니까?

많은 경우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창조과학에 실망하게 됩니다. 공부를 해 보면 창조과학에서 얘기하는 ‘젊은 지구론’에 대한 데이터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오래된 연대를 보여주는 데이터가 훨씬 더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데이터들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좋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창조과학의 진화론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는 공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꼭 창조과학식으로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성경과 과학을 연계시키는 시도는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천동설을 성경의 올바른 해석으로 못 박았을 때의 오류들을 그대로 답습할 우려가 있습니다.

지적설계적 입장에서 진화에 대해서 어떤 문제를 느끼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진화’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진화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구분 없이 사용됩니다. 우선 진화는 ‘유전자 풀에서의 시간에 따른 유전자 빈도수의 변화’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공통후손 이론’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적설계 이론 내부에서도 개개인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지적설계와는 독립적인, 즉 양립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화는 ‘생물학적 변화가 돌연변이가 자연 선택되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메커니즘이 특정한 상황에서 국소적 최적값(local optimum)을 찾기 위한 유용한 알고리즘 중 하나라는 데는 부인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진화에 관한 실험적 데이터들은 지적설계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돌연변이/자연선택 메커니즘이 ‘모든’ 생물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혼합된 의미의 진화일 때 문제가 되며 이는 도킨스와 같은 유능한 대중 저술가들이 진화론에 부여한 ‘함의’이기도 합니다. 도킨스 같은 경우 생물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자연주의적인 방식으로 모두 설명되었기 때문에 ‘지적으로 충실한 무신론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지적설계에서 하나라도 비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을 제시한다면 앞에서의 ‘모든’이라는 조건은 무너지게 됩니다.

지적설계 이론이 창조과학과 진화론 사이에서 비생산적인 긴장을 겪고 있는 기독 과학자들에게 많은 구체적인 데이터들에 대한 나름의 수용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프로젝트를 설정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하셨는데요, 아직 지적설계 이론의 핵심적인 논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지적설계는 한 마디로 ‘자연에서 설계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다룹니다. 말을 바꾸자면, 지적설계에서는 ‘자연적인 원인’과 ‘비자연적인 원인’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학적으로 봤을 때 이것은 특수한 형태의 ‘검출(detection) 문제’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적설계의 설계 추론 이론을 확립했던 뎀스키는 이를 일반화된 피셔의 가설 검증 이론으로 재해석 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적설계의 ‘설계 추론’은 바로 무작위성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을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자연적인 원인은 ‘우연’과 ‘필연’으로 구분이 됩니다. 여기서 ‘우연’이라는 원인이 만들어 내는 것은 보통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작위성을 많이 보여줍니다. 만일 무엇이 무작위인지를 규정할 수 있다면 ‘우연’이라는 자연적인 원인을 구분해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뎀스키는 제거적 접근법이 무작위성에 대한 실용적 정의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럴 경우 ‘필연’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원인도 우연보다는 좀 더 쉽게 알아낼 수가 있을 것이고요. 그렇다면 그 두 가지를 다 제거했을 때, 만일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비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비자연적인 원인을 ‘설계’로 정의하고 이런 ‘설계’를 찾는 것이 바로 ‘지적설계’ 이론의 가장 중요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설계’와 지적설계의 ‘설계’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지적설계의 접근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설계’를 보여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지적설계’라는 용어 때문에 내용을 알아보기도 전에 그것을 창조과학의 아류 혹은 변종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과학적 담론의 하나로서 지적설계론은 학문적 논리 내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주요한 입장들을 자연주의적 진화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해 왔습니다. 이는 고민하는 많은 기독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설득력 있는 하나의 입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SCR에서 번역하신 두 권의 책을 포함해서 지적설계론의 대표적인 저서들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96년도에 출판된 마이클 베히의 <다윈의 블랙박스>는 생화학이라는 영역에서 ‘설계된 것’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책입니다. 베히는 다윈주의 메커니즘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시스템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화학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설계 가설’이 하나의 유력한 설명 중 하나라는 것을 설명하는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윌리엄 뎀스키가 ‘설계 추론’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자연에서 설계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뎀스키의 철학박사학위 논문 주제였는데 후에 이 논문은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The Design Inferenc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이 책의 핵심 개념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책이 저희가 번역한 <지적설계>였습니다. 2002년에 나온 뎀스키의 No Free Lunch에서는 설계 추론을 일반화된 피셔의 이론으로 재구성하면서, 동시에 설계 추론을 통해서 마이클 베히의 논리를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미 국내에 지적설계 관련 도서들이 어느 정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적설계의 흐름을 만들어낸 필립 존슨의 <심판대의 다윈>이 다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필립 존슨의 책들 <위기에 처한 이성>이나 <다윈주의 허물기>는 지적설계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최근에는 SCR에서 Debating Design이라는 책을 번역 중에 있는데요, 이 책을 통해서 관심 있는 독자들은 지적설계에 관한 보다 발전된 논의들을 접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쉽게 읽기 쉬운 관련 서적으로는 리 스트로벨의 <창조설계의 비밀>이 있고, 초창기부터 지적설계에 관여해 왔던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 역시 일독을 권할 만한 책입니다.

말씀하셨듯이 지적설계가 기존의 창조과학과 분명히 구별되는 목적과 방법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과 지적설계가 한 통속이라는 주장이 널리 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부시로 대표되는 호전적인 기독교 우파의 신종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이 만연하지 않습니까? 또한 장대익 선생은 지적설계가 일종의 ‘진화론 흠집 내기’ 혹은 ‘네거티브 전략’일 뿐 과학적인 담론의 역사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할 만한 추동력이나 대안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저 멀리 우주 공간에서 설계된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는 ‘과학’이라고 부르지만, 유사한 방식으로 지구상에서 설계된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는 ‘종교’로 규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수많은 자연발생적인 전자기파 신호로부터 외계 지성에 의한 신호를 구분해 내려고 시도하는 외계지성탐사(SETI) 프로젝트인데, 많은 경우 이러한 시도는 과학 프로젝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편 지적설계는 일반적으로 자연적인 원인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해 내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 주변의 생물에다 적용하려고 하면 기성 과학계에서 거센 발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적설계 진영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젊은 지구’ 창조론자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지적설계를 ‘보수 기독교 우파’로 분류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반례들도 많이 있습니다. 진영 안에 비기독교인은 물론이고 불가지론자, 이신론자로 분류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지적설계는 큰 울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철학적,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동의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인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극단적인 자연주의자를 빼면 다 들어 올 수 있다고 봅니다.

장대익 박사께서 최근에 펴낸 책을 봤는데 지적설계에 대한 언급은 매우 짧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지적설계에 대한 ‘흠집 내기’나 ‘네거티브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적설계운동에는 한마디로 진짜 과학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가 “지적설계에는 논문 심사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학회와 학술지가 있다면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만일 ‘지적설계’에 ‘논문 심사 시스템’이 있다면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인데, 뭔가 굉장히 큰 문제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대부분의 과학이나 공학 분야들이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논문을 쓰면 ‘미국의 정보이론 학회’에서 출판하는 논문지에 논문을 제출합니다. 그러면 그 학회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논문을 보내 심사를 받습니다. 주제가 워낙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논문의 경우 누구에게 논문심사를 받게 될 지까지도 대략 후보군을 추측할 수 있는 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학회에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 논문을 내면 심사를 받은 후에 그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발표를 합니다. 분야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어떤 전문 분야가 있을 때 그 분야의 학회가 있고 회원이 있고 저널이 있어서 자체 논문을 펴내는 것은 정상입니다. 지적설계 학회나 지적설계에 관한 논문이 있어도 ‘그들만의 리그’라고 폄하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지적설계를 표방하지 않는 다른 학회의 저널에 실린 논문이 없다는 의미로 저런 말을 한 것이라면, 이것은 명백히 사실과 다릅니다. 분명히 ‘지적설계’를 주제로 한 ‘피어 리뷰’되는 저널에 실린 논문들이 여러 편 존재합니다. 특히 2004년에 스티븐 마이어가 지적설계를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논문을 소위 ‘SCI 저널’에 게재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논문이 나온 후에 ‘논문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들은 일단 이 저널자체가 대단치 않은 것이라 깎아 내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논문 게재 판결을 내린 논문지의 편집자를 인신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심사자들은 익명이라 재난을 피할 수 있었지만요. 그들이 평소에 요구한 바대로 익명의 전문가들의 심사를 받는 피어 리뷰과정을 통과해서 논문이 게재됐는데도 그 전까진 멀쩡한 진화생물학자로 인정받던 그 편집자가 ‘보수 우익’ 혹은 ‘근본주의자’의 혐의를 받고, 더 나아가 ‘창조론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검증의 대상이 되는 웃지 못 할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기독교인도 아니던 그 편집자는 음모론의 희생양이 되었고, 결국 그 저널에서는 그 이후에 편집회의를 거쳐서 ‘지적설계라는 주제의 논문은 다시는 게재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한편으로는 논문을 게재해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게재된 논문이 없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게임의 규칙을 바꾸면서까지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적설계는 사실상 현존하는 많은 진화에 대한 실험적 데이터와 아무런 모순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적설계의 메인 프로젝트는 자연에서 설계를 탐지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입니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연구 주제가 될 수 있으며 실제로 스튜어트 카우프만 같은 사람은 “어떤 것이 설계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적법하고 깊이 있는 과학적 문제”라고 인정합니다.

지난 겨울에 공학박사논문 심사를 통과하셨는데요, 논문의 주제를 결정하는 데도 지적설계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반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적설계에 입각한 공학하기가 가능한지요? 이 부분에 관심이 있는 후배들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논문 주제는 정보 이론의 한 가지라 할 수 있는 의사난수(pseudo random) 생성에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지적설계에서는 정보이론을 사용하는데요, 학부시절 정보이론에 대해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어서 여기로 뛰어 들었습니다. 사실 정보이론에는 실제 순수한 정보의 전달과 처리에 대한 추상적인 이론을 다루는 분야가 있고 이런 추상적인 결과를 바탕으로 실제로 정보이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다루는 응용 분야가 있습니다. 보통 많은 관련 연구실에서는 문제해결 분야를 많이 다루는 편입니다.

물리학에 뉴턴이 있다면 정보이론에서는 섀넌(C. E. Shannon)이 있는데요, 섀넌은 1948년에 잡음이 많은 환경 속에서 정보를 오류가 없이 전달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이론적인 답변을 내 놓았습니다. 또 한 편으로 섀넌은 정보를 어떻게 하면 보안적인 측면에서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한 가지 답변을 내 놓았습니다. 이 때 사용되는 것 중 하나가 의사 난수, 다시 말해 난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난수가 아닌 수열들입니다. 의사 난수와 관련해서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학문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무작위성(randomness)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사람들은 무작위적이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무엇이 무작위적인지에 대해서는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했지요.

바로 이 무작위성에 관한 문제가 지적설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 제 학위 논문은 매우 세부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지적설계 논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보이론이나 무작위성에 대한 연구는 아마 제가 평생 연구할 주제이고 앞으로 연구하다보면 다른 것뿐만 아니라 지적설계와 관련해서도 재미있는 결과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소간 상투적인 질문으로 마무리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과 관련하여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지요. “How should we then live?”

저도 이제 고작 하나의 과정을 막 끝냈을 뿐입니다. 저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현재로서는 저에게 정답이 없기 때문에 지금 탐색 중에 있습니다. 저에게 지적설계는 하나의 실험입니다. 일단 현재로서는 최선이라 보이기 때문에 지적설계를 선택한 것이죠. 지적설계는 엄밀히 말해 기독교지성운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 세계관과 문제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뿐입니다. 사실 ‘기독교 학문’, ‘기독교 지성’이라고 할 때 이것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서 한 때 고민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위 ‘가톨릭 개구리’와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도킨스는 ‘다윈은 지적으로 충실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보면 그 자체는 별로 무신론적이지 않은데 도킨스가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 뒤에 깔린 ‘자연주의’라는 전제 때문입니다. 만일 물질과 에너지와 그들을 규정하는 법칙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면 신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우리는 자연주의를 가정해야할까요? 자연주의를 가정하는 것이 왜 그토록 대세가 되었을까요? 이는 그동안 적절하게 자연과 ‘비자연’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천둥과 번개를 신이 일으켰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빈틈의 하나님의 오류’가 두렵기 때문에 ‘자연에 한정’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충분할까요? 만일 자연과 비자연을 구분할 방법이 있다면? 거듭 말하지만, 지적설계는 자연적인 것을 배제한 나머지를 ‘설계’로 정의합니다. 사실 실제로 ‘설계’는 ‘비자연’을 의미할 뿐입니다. 만일 실제 자연에서 자연적인 것을 제대로 규정할 수 있고 이것을 완전히 배제시켰을 때 정말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원리적으로 자연주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주의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한적 자연주의’에 동의한다면, 지적으로 충실한 무신론자가 되기보다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모순을 느끼지 않고 학문을 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물론 이 길 끝에 가봤더니 막다른 골목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이라는 결론을 전해 듣고서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우리가 가보는 것이지만, 사실은 지적설계의 잠재성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이 길을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신다면, 지적설계가 정말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주제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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